[리뷰] 안드레이 서반의 ‘다른 춘향’

‘다른 춘향’ : 춘향전 새로운 얼굴의 발견

춘향전이 연애소설인 줄 알았다. 다른 춘향을 보고서야, 러브스토리 안에 숨은 사회적인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부패한 권력이 한 개인의 존엄을 폭력적으로 박탈1하는 과정이 그렇게 적나라하게 담겨있을 줄 몰랐었다. 춘향전은 그 폭력에 저항하며, 자신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 죽음도 마다하지 않은 ‘개인’의 이야기였다.

‘춘향가’는 한 여인이 사랑을 지키기 위해 유혹을 인내하고, 부패한 사회에 저항하면서 정의를 이뤄내는 이야기입니다. 사회에 맞서는 여인의 힘과 의지, 그 가치에 우리는 감동하고 기억해야 합니다.

연출가 안드레이 서반Anderi Serban의 말이다. 흥미롭게도, ‘다른 춘향’은 기존 춘향전을 현대적으로 조금 각색된 작품일 뿐, 줄거리는 거의 흡사하다. 미리 말해두고 싶은 것은,?’다른 춘향’의 매력은 춘향전 각색의 완성도 보다, 기존 춘향전을 새로운 시각으로 볼 수 있게 하는 힘이 있다는 점이다.

 

 

안드레이 서반의 ‘다른 춘향’ 줄거리

안드레이 서반이 각색한 춘향전의 줄거리는 대강 이렇다. 한국에서 절대적인 (부패)권력을 가진 변학도는 이름난 미녀 성춘향을 차지하기 위해 자청해서 남원으로 내려와 시장이 된다. 여성 편력이 심해, 취임식 전부터 축하연을 열어 술집여자들을 불러모아 놀았다. 이는 언론2 에 보도되어 ‘실시간 검색어’에 오를 정도였다. 그러나 정작 춘향은 보이지 않았다. 측근들을 풀어-명분 없는 명령에 이들도 껄끄러웠지만- 강제로 춘향을 시청으로 잡아들였다. 변학도는 춘향에게 성관계를 요구하며 희롱과 회유, 협박을 멈추지 않는다. 자신의 명령을 거부하는 춘향의 옷을 벗긴 뒤3, 몽둥이로 마구 팼다4. 죽음에 이르기 직전까지 구타를 당한 뒤 유치장에 갇힌다.

무참히 구타를 당한 춘향

 

변학도는

“나의 말은 곧 국가의 말이며, 나의 말을 무시하는 것은 곧 국가의 존엄을 훼손하는 것이다”

는 따위의 논리를 펼치며 춘향을 탄압한다. 시민사회단체들은 이에 대해 춘향의 석방을 요구하지만, 변학도의 공권력(경찰)에 의해 곧 진압 당해버린다. 진보정당이나 인권단체,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조차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절망스러운 사회 수준을 은유하는 듯 보였다.

원작 속 ‘양반에 대한 조롱’은 정부에 대한 저항으로 각색되었다.

연대할 세력이 없는 개인, 춘향에게만 면회가 허용되지 않는다. (3년 쯤인가)세월이 흘러 그 곱던 피부는 온데간데없이 삭았고, 머리는 백발이 되었으며, 일어설 기운조차 없을 정도로 쇠잔해졌다. 변학도의 생일파티 연회장에서 처형을 당할 예정이었고, 처형 직전 검사 이몽룡이 나타나 부패한 그들 일당을 모두 검거한다.

 

 

안드레이 서반의 ‘다른 춘향’은 배드엔딩

춘향전은 기생의 딸 춘향과 양반의 아들 몽룡은 계급을 뛰어넘는 러브스토리로 해피엔딩으로 끝난다. 그러나 안드레이 서반의 ‘다른 춘향’은 확실히 다른 결말을 맺는다. 이 작품의 제목이 몽룡전이었다면 해피엔딩이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으나, 춘향에게는 명백히 배드엔딩이다. 이 모든 것을 압축한 마지막 씬에서 상당한 여운을 느꼈다. 춘향은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휠체어에 앉아 텅빈 눈으로 객석을 바라본다. 수트를 멋지게 입은 몽룡은 휠체어 뒤에 서 있다. 장면 자체는 단순해보인다. 그러나 과연 그들은 이전처럼 사랑할 수 있을까? 객석에서 2시간을 보낸 나로서는 부정적이다. 이 둘은 함께,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다. 그러나 더 이상 함께 할 수 없는 관계가 될 것이라고 결론짓는 것이 자연스럽다.

‘국가 폭력 후유증을 앓는 여자’와 ‘국가의 핵심 권력자로 떠오르는 남자’라는 구성은 중요하지 않다. 더 중요한 이유가 있다. 몽룡의 삶 측에서 보면 명확히 알 수 있다. 지난 수년 간 몽룡은 사실상 춘향을 완벽히 잊었다. 남원(춘향)을 떠나 서울에서 상류층과 열심히 어울리며 출세의 길을 밟아간 몽룡은 단숨에 사법고시 패스 후 검사가 되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춘향을 다시 떠올렸으며, 그녀를 구하기 위해 남원으로 암행을 했을까? 검사 이몽룡은 비리 공직자에 대한 조사를 하던 중 우연히 남원에 대한 파일을 보게 되었고, 춘향 관련 사건 기록도 보게 되었다. 그제야 춘향을 떠올린 것이다. 국가 제2의 부패한 권력자5를 제거하러 남원으로 향한다. 그리고 부패 공직자(변학도)를 타진한 ‘실적’을 쌓았다. 그 속에는 곧 있을 국회의원 출마에서 표심을 얻어낼 것이라는 계산도 있다. 다시 말하자면, 몽룡을 움직이게 한 동기는 ‘감옥에 갇힌 옛사랑’을 구출하는 것이 아니라, 부패 공직자 처벌에 가까워보인다는 것이다. 한편 그동안 춘향은 고문 후유증을 얻었다. 기다림에 늙고 병들었으며, 정신착란 증상6까지 얻었다. 이제는 ‘몽룡에 대한 사랑’이라는 신념이, 대체 그것이 뭐였는지 춘향 자신조차 잘 모르게 되는 것처럼 보였다. 사랑의 대상이든, 정치적 입장이든 내가 선택한 삶의 방식이 옳다고 믿고, 그것만이 나를 구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의 결과는 누구도 알 수 없을 것이다. 내가 봤을 때 춘향은 단지 운이 좋았던 편이다.

“과연 정의의 승리 뒤에, 더 큰 사랑의 승리가 뒤따를까요?” 라는 말을 남긴 춘향은 극이 끝나도, 웃으며 손을 흔들지 않는다.

‘다른 춘향’ 관람을 망설인다면

피를 뒤집어쓴 채 죽어가는 딸 춘향을 보며 엄마인 월매가 노래를 부르는 씬과, 검사 이몽룡이 변학도의 현장을 덮치기 전, 모래 위에 시조를 써내려가는 씬에서 전율을 느꼈다. ‘다른 춘향’을 관람을 망설인다면, 보기를 권한다. 기왕이면 가까운 중앙 좌석에서 보길 바란다.

 

  1. 변학도는 자본과 권력을 이용해 춘향의 신체를 강제로 구속하고, 끊임없이 섹스를 요구하며 폭행한다.
  2. 극 중간에 변학도가 언론(기자)을 탄압하는 씬이 있다.
  3. 작중 노출/폭력 수위가 다소 높다
  4. 이때 춘향이 부르는 십장가(十杖歌)는 상당히 처절하다.
  5. 재미있게도, 극중에서 ‘제1의 부패 권력자’에 대한 언급은 직접적으로 하지 않는다.
  6. 자신의 어머니 월매와 몽룡이 눈이 맞은 건 아닐까 의심하는 씬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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